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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규햇형
댓글 0건 조회 0회 작성일 25-09-06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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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3.0 ± 손오공게임 ±☏ 59.rzp469.top ㎎한국전쟁은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큰 상처와 7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휴전 상태를 남겼다. 참혹한 전장과 첨예한 이념 대립의 그늘에서 개인들은 각자 아픔과 고난을 인내해야 했다.
김환기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일주일씩이나 걸리는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해야 했고, 피난지에서의 고단한 삶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마찬가지였다. 당시 30만 명이었던 부산 인구가 100만 명이 될 정도로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주거 공간이 부족하여 산으로, 산으로 판잣집이 세워졌다. 김환기는 그나마 그곳에 살던 화가 이준(李俊, 1919~2021)의 배려로 좁기야 하지만 서너 평 정도 되는 그의 2층 다락방에서 지내기도 했다. 무더운 여름날, 달궈진 좁은 방에서 작업하던 자신을 보며 쓴 글에서도 보듯이 피한투뱅키스
난 생활 중에도 그림 그리는 열정은 여전했다.
“미쳤다면 몰라도 폭양이 직사하는 생철 지붕 바로 밑에서, 그것도 허리마저 펼 수 없는 다락에서 그림을 그렸으니, 일을 하다 말고 내 정신상태를 의심해보았다." (『편편상』, 1961년 9월호)”
배급을 주는 해군 종군화가단에 입단하여 군함의 함정 생활을 그리는 일도 했다. 여명증권
군함을 타지 않는 시간에는 표지화를 그리고 공모전에도 응시했으며, 3회까지 계속된 신사실파 전시회, 뉴서울 다방에서 남관(南寬, 1913~1990)과 ‘2인전’도 열었다. 출품작은 <진해 풍경>, <꽃장수>, <판잣집>, <달밤>, <학춤>, <산> 등으로 전쟁 중이다 보니 유화물감 구하기가 힘들어 수채화 작품과 소품이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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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김환기, 진해풍경, 1952, 유화, 36.5×39.5cm. (오른쪽) 김환기, 진해풍경, 1952, 종이에 수채, 27×33cm. 이 시기의 출품작이 명확하지는 않으나 당시 그려졌던 '진해 풍경'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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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김환기, 꽃장수, 1952, 캔버스에 유채, 45.5×53cm. (오른쪽) 김환기, 판자집, 1951, 캔버스에 유채, 73×90cm. / 필자 제공


전쟁이 길어지면서 서울에 있던 학교들이 부산2011주식시장
에 임시 교사를 마련했다. 1950년 서울대 교수직을 사임했던 김환기는 이때 홍대 미대 교수로 부임하여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후학 양성에도 힘쓰게 된다. 당시 이상범, 이종우, 윤효중 등이 같이 미술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듬해인 19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될 즈음, 김환기는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할 수 있었다.
김환기의 흔적은 종로뿐 아니라 을지로나 남대문로에서도 찾을 수 있다. 부산에서 ‘2인전’을 계기로 알게 된 브루노(Bruno) 문정관(文政官)의 도움으로, 김환기는 1954년 을지로에 있는 미국공보원(USIS, 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에서 전시회를 연다.
을지로는 일제 강점기에 '경성의 월스트리트'로 불릴 만큼 식민지 자본의 핵심 거점이었다. 1938년 일본의 재벌 미쓰이물산(三井物産)은 이곳 을지로에 모더니즘 양식의 4층 건물을 세우고 경성지점을 둔다. 해방 후에는 적산 건물로 미국 소유가 되면서 미국대사관으로 쓰였다. 처음엔 반도호텔에 자리를 잡았다가 부산으로 피난 갔던 대사관이 1952년 서울로 돌아오면서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이후에는 대사관이 세종로로 이전하면서 1990년까지 미국문화원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 소유권은 현재 서울시에 있다.
이곳은 ‘1985년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5·18민주화운동 진압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으며 서울대를 비롯한 5개 대학 73명의 대학생이 2층 도서관을 점거하고 72시간 동안 단식 농성을 벌인 사건이었다. 을지로에 남아있는 유일한 1930년대 건물로, 현재는 ‘구조안전위험시설물 알림’이라는 노란 딱지를 붙이고 폐쇄되어 묵묵히 90여 년의 역사를 버티고 있다.



(왼쪽) 미쓰이물산 경성지점 낙성식, 경성신문 1938.10.30. (오른쪽) 김환기 개인전 개최 기사, 동아일보 1954. 2. 4. / 필자 제공






구 미국공보원의 현재 모습. / 사진 출처. 국가유산청


김환기는 1954년 2월 미국공보원에서 열린 전시회에 <매화>, <산>, <항아리>, <가을 정취>, <섬에서> 등을 출품했다. 미술 작업을 직접 하기도 했던 브루노 문정관은 화가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피난 시절, 화가들의 어려운 상황을 알고 유화물감이나 재료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 그 인연은 김환기가 뉴욕에 갈 때까지 이어진다.
피난 가면서 하나씩 끈으로 엮어서 마당 우물 속, 혹은 광이나 마루 밑에 숨겨뒀던 백자항아리는 돌아와 보니 깨지거나 없어져서 거의 남은 게 없었다. 김환기는 마치 도공이 된 것처럼 그렇게 사라진 백자항아리에 새, 구름, 산을 그려 넣어 화면에 빚어낸다. 항아리 파편의 촉감처럼 두터운 마티에르의 그림을 그리고 말리면서 유약을 바르듯 켜켜이 질감을 쌓아갔다.



김환기, 항아리, 1955-56, 캔버스에 유채, 65×80cm. / ⓒ 환기재단·환기미술관






김환기, 항아리, 1956, 캔버스에 유채, 100×81cm. / ⓒ 환기재단·환기미술관






김환기, 정원, 1957, 캔버스에 유채, 145×89cm. / ⓒ 환기재단·환기미술관






김환기, 영원의 노래, 1956, 캔버스에 유채, 50×100cm. / ⓒ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이 시기 김환기는 백자항아리와 함께 우리의 산과 구름, 달, 새, 사슴, 구름, 나무 등 자연을 탐구하며 이를 주된 화제로 그림에 등장시킨다. 한국의 정서를 대표하는 전통적 소재를 현대적 미감으로 구현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해간 것이다.
파리에 정착한 건축가 김중업의 권유로 파리 진출을 꿈꾸던 김환기는 세계 무대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픈 욕구가 생긴다. 그런 생각을 아내 김향안에게 건네자, 바로 조력자의 저력이 발동한다. 김환기를 한국에 남겨두고 김향안은 1년 앞서 먼저 파리로 떠난다. 프랑스어를 배우고 소르본대학교와 에콜 드 루브르에서 미술사와 미술 비평 등 학업을 하면서, 파리 미술 시장의 동태를 파악해서 김환기에게 서신으로 세세하게 전한다. 김향안은 화랑을 물색하면서 파리에서 그림을 전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열심히 발로 뛰었고 김환기에게 독려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하나둘 출품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일당에 모아 개전(個展)을 해봐야겠다는 것 —역시 미술가의 발표는 꼭 개전(個展)이어야겠어요. 화안(花岸, 향안이 김환기를 부르는 별칭)도 부지런히 자신(自信) 있게 작품을 만들어, 만드신 족족 먼저 보내시고 뒤이어 오세요. 여기 와보니 화안 그림 참 좋아요. 여기 그림들 거기서 생각한 것처럼 뭐 대단치 않아요. 여기 오시면 한동안은 제작(製作) 못하실 거야요. 그러니 한국에서 작품을 만들어 가지고 오셔야 해요." (김향안, 巴里에서 보내온 愛情의 書, 수화 김환기 글 모음 중)
‘몽마르뜨 언덕에 올라 물랑루즈를 보면서도 겉에서만 훑어보고 안쪽은 나중에 화안(花岸)과 같이 들어가고 싶어 아껴 두었다’는 내용의 서신에서 김향안의 애틋한 마음을 몰래 엿본 것 같아 입꼬리가 씰룩거리면서도 몽글몽글한 무언가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동분서주 노력한 결과 파리의 센강변에 있는 베네지트 화랑(Galerie M. Benezit)에서 개인전을 열기로 결정했고 화랑은 김환기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그렇게 가고 싶은 파리에 가게 되었지만, 경제 사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14년 전, 상속받은 유산 중 소작농들의 빚문서와 땅문서는 무상으로 모조리 돌려준 데다 교수라는 직업으로 큰돈을 벌 수는 없었다. 남은 재산을 곶감 빼먹듯 하여 정작 파리로 떠나기 전 남은 건 가족이 살고있는 성북동 집 한 채가 유일했다. 그마저도 돈을 융통할 수도 없어 당장 살고있는 집을 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재산을 처분했다. 그리고 당시 반공 이념의 확산을 목표로 설립된 아시아재단(Asia Foundation)에서 왕복 항공료에 해당하는 1,500달러를 지원받았다.



파리에 도착해서 머문 첫 번째 아틀리에 겸 아파트. 뤼 다사스 90번지에 위치해 있다. / 사진. ⓒ 환기재단·환기미술관


베네지트 화랑의 매니저는 폴란드 태생의 루냐 체코프스카(Lunia Czechowska)였다. 그녀는 우리도 잘 아는 유명한 화가의 뮤즈였다. 바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의 <부채를 든 여인>, <루냐의 초상> 등에 등장하는 모델이다. 모딜리아니는 루냐를 모델로 최소 14점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담 루냐는 김환기 내외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베네지트 화랑은 물론 남프랑스 니스의 무라토르 화랑, 벨기에 브뤼셀의 슈발드베르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 수 있게 도움을 준 친절한 사람이었다.



(왼쪽부터)아메데오 모딜리아니와 루냐 체코프스카, 그리고 그녀의 여동생 펠리샤, 1913년 경. / 사진 출처. 위키백과/마코프스키 가족 기록보관소






(왼쪽) 모딜리아니, 부채를 든 여인, 1919, 캔버스에 유채, 100x65cm. / ⓒ 파리시립현대미술관, (오른쪽) 모딜리아니, 루냐 체코프스카, 1919, 캔버스에 유채, 80x52cm / ⓒ Museu de Arte Assis Chateaubriand (MAC)


김환기는 전시회를 준비하며 그림을 그리는 동안 다른 사람 그림에 영향을 받을까 봐 다른 전시회 구경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첫 번째 전시는 각종 매체에 호평 일색이었다. 캐나다 화랑에서 전시회를 약속하기도 하고 이탈리아 피렌체 ‘단테의 집’의 《파리의 예술가전》에 출품을 의뢰받기도 했다. 자신감을 얻고 그리기에 전념하며 파리 체류 기간 총 5회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타국에서 지내는 고향에 대한 향수였을까. 이 시기 백자와 함께 새와 산, 달, 매화 등 애틋한 한국의 자연이 더욱 풍부하게 드러난다.



파리의 화랑에서 개최한 개인 전시회 포스터. / ⓒ 환기재단·환기미술관


"내 예술은 하나도 변하지가 않았소. 여전히 항아리를 그리고 있는데 이러다간 종생 항아리 귀신만 될 것 같소. 여기 와서 느낀 것은 시 정신이오. 예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할 것 같소. 거장들의 작품에는 모두가 강력한 노래가 있구려. 지금까지 내가 부르던 노래가 무엇이었다는 것을 나는 여기 와서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 같소. 밝은 태양을 파리에 와서 알아진 셈" (「파리통신」, 1956)
「파리통신」의 내용을 보면 김환기가 선호한 작가를 알 수 있다. 김환기는 파리에서 더욱 깊게 알게 된 알프레드 마네시에(Alfred Manessier, 1911~1993)와 장 뒤뷔페 (Jean-Philippe-Arthur Dubuffet, 1901~1985)를 매력 있는 화가로 꼽았고 피카소와 루오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기존의 화풍과는 다른 점이 나타나기도 한다. 전통적 소재와 자연을 기본 화제로 작업하지만, 산을 표현하는 선은 마치 먹으로 선을 다루듯 여러 획의 검은 선들이 중첩된 산세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이 시기의 <산>, <산월> 등의 작품은 중첩된 선의 구성으로 공간감이 풍부한 산이 된다. 선을 연구하며 기법의 변화가 나타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김환기, 산, 1958, 캔버스에 유채, 73×50cm. / ⓒ 환기재단·환기미술관






김환기, 산월, 1958, 캔버스에 유채, 130×105cm. / ⓒ 환기재단·환기미술관


김환기는 꾸준히 화업을 이어갔지만, 파리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전시회를 통하지 않고는 작품 판매가 어려웠고, 그나마 전시회에서도 많이 팔 수 없는 현실에 김향안은 파리에서 돈을 빌리러 다녀야 했다. 파리의 현실에 맞닥뜨리는 동안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한국에 있는 아이들도 고생이 심했다. 결국 1959년 4월 귀국해 홍대 미대 교수로 복직한다.
귀국한 해 12월, 김환기는 반도화랑에서 소품전을 걸고 전시회를 개최했다. 아마도 큰딸의 결혼식에 돈을 보탤 요량으로 잘 팔리는 소품전을 생각한 것 같다. 김환기의 사위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화가 윤형근(尹亨根, 1928~2007)이다. 김환기가 큰딸의 결혼식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을 그곳, 반도화랑. 현재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었다.



반도호텔, 1960년 3월 모습. / 사진 출처. 위키백과


반도호텔은 1938년 일본의 재벌 노구치 시다가후(野口遵)가 세운 지상 8층의 호텔 건물로, 해방 당시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고 한다. 노구치가 이 건물을 세우게 된 연유는 많이 알려진 대로 조선호텔의 문전박대였다. 투숙을 위해 방문한 허름한 옷차림의 노구치를 호텔에서 박대하는 바람에 조선호텔을 내려다볼 수 있게 높은 건물로 완성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호텔 건물 로비 한켠에서 시작한 반도화랑은 우리나라 근대 화랑의 효시가 되었다. 김종하, 박수근, 이종우, 도상봉, 이대원 등의 화가,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 등 미술계 유명 인사가 관여한 선구적 상설화랑이었다. 반도호텔이 세워지기 전에는 이 터에 있던 건물에 1924년 창립한 ‘고려미술회(高麗美術會)’가 고려미술원을 개원했다. 고려미술원은 동양화로는 김은호, 허백련, 이병직이 강사로, 서양화는 강진구, 김석영, 김명화, 나혜석, 정규익 등 도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화가들이 활동하며 이마동, 구본웅, 길진섭 등의 근대 화가를 배출한 곳이다.
반도호텔은 해방 후 미군정 관리하에 고위 관료들의 숙소 겸 사무실로 쓰였고 이후 미 대사관으로도 사용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로는 정부 소유가 되어 호텔로 운영되다가 1974년 롯데그룹에 매각되어 38층의 호텔 건물로 거듭난다. 현재는 롯데호텔갤러리가 호텔 직영으로 운영되면서, 1923년 고려미술원을 필두로 반도화랑을 거쳐서 롯데호텔갤러리로 이어지는 미술의 100년사를 잇고 있다.
박주형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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